'주52시간제' 때문에 제작비 2배 폭등... K드라마 제작사들 '파산 위기'

2025-03-05 11:16
 한때 세계 최고 콘텐츠를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찼던 한국 드라마 제작 현장은 지금 위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글로벌 OTT의 등장으로 K-콘텐츠의 전성기가 도래했다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는, 천정부지로 치솟는 제작비와 불균형한 수익 구조로 신음하는 제작 현장의 실상이 숨겨져 있다.

 

특히 지난 10년간 제작비 급등은 한국 드라마 산업의 지속 가능성에 심각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 상태로 한한령이 해제되면, 세계 최고 수준의 인적 자원들을 중국이 싹쓸이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 드라마의 경쟁력을 지탱해온 창의적 인재들이 더 나은 조건을 찾아 해외로 떠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2016년 K-드라마 블록버스터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KBS 2TV '태양의 후예'의 총제작비는 130억원이었다. 당시 송혜교, 송중기라는 한류스타의 출연과 그리스, 터키 등 해외 로케이션, 화려한 전쟁 장면으로 "제작비 100억원 시대를 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불과 8년이 지난 지금, 이 금액은 국내에서만 촬영하는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보다도 저렴한 수준이 되어버렸다.

 

최근 트렌드를 보면 제작비 상승세는 더욱 가파르다. 한류스타 출연 없이도 지난해 화제를 모은 tvN '선재 업고 튀어'의 전체 제작비는 200억원에 달했다. 최근 종영한 tvN '별들에게 물어봐'는 무려 500억원, 공개를 앞둔 넷플릭스 오리지널 '폭싹 속았수다'는 60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넷플릭스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한 '오징어게임'의 시즌2, 3 제작비는 업계에서 총 1000억원 정도로 회자되고 있다.

 

한국 드라마의 제작비 규모는 이미 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미 일본의 제작비를 넘어선 지 오래됐다"며 "일본 제작비는 한국의 3분의 1 수준이라, 최근 글로벌 OTT에서 유명 배우들과 연출자만 데리고 협업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경우, 대규모 제작비 투입이 이루어지지만 국가 차원에서 출연료에 제한을 두어 제작비 상승에 제동을 걸고 있다. 2022년 중국 광전총국이 발표한 '중국 드라마 발전 계획'에 따르면, 배우 출연료가 전체 제작비의 40%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주요 배우 개런티는 전체 출연료의 70%를 초과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모델은 자유시장경제 원리가 작동하는 한국 드라마 제작 환경에서는 적용하기 어렵다.

 

제작비 급등으로 인해 업계에서는 총제작비 공개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글로벌 OTT들의 공격적인 투자로 한국 콘텐츠 산업이 황금기를 맞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로 인해 스타 배우들의 출연료가 지나치게 상승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평균 제작비 상승은 결국 제작사의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제작 현장에서는 글로벌 플랫폼만 탓하기보다 "제작비 상승을 부채질하는 각종 규제가 더 목을 조이고 있다"는 불만도 터져 나오고 있다. 최근 인기 드라마를 선보인 B제작사의 C 이사는 2019년 7월부터 촬영장에서 적용된 주52시간 근무제가 제작비 부담을 크게 가중시켰다고 토로했다. 주52시간 근무제 덕분에 과거 드라마 제작 현장의 고질적 문제였던 밤샘 촬영은 사라졌지만, "제작비가 최소 1.5배에서 1.8배 정도는 늘었다"며 "일일 촬영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전체 기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고, 자연히 비용도 불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급증한 제작비가 현장에서 고생하는 스태프들에게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제작 관계자는 "최근 유명 배우가 요청한 몸값을 맞춰주기 위해 스태프 인건비를 조금씩 줄일 수 없겠냐는 제작사의 요청을 받았다"며 "그 배우가 아니면 편성이 불발되고, 그렇게 되면 드라마 제작 자체가 무산되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태양의 후예' 같은 작품을 지금 다시 만든다면 총제작비가 3배 이상 늘어난 400억원 이상 들 것"이라며 "하지만 늘어난 제작비만큼 스태프들의 임금이 늘어나진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는 K-드라마의 글로벌 성공 뒤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생활고를 호소하는 현장 스태프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K-드라마 제작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열악한 처우로 인해 현장을 떠나게 된다면, 한국 드라마 산업의 경쟁력은 급격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특히 한한령 해제 후 중국 자본이 한국의 우수 인력을 고액 연봉으로 스카우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OTT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제작 구조와 규제 체계다. 과거 영화, 드라마, 웹드라마는 각자 다른 제작 방식과 수익 모델로 나름대로의 가치사슬을 구축해왔다. 사업 영역이 다른 만큼 출연료, 스태프 임금 테이블도 달랐다. 그러나 OTT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러한 경계가 허물어졌고, 국내 방송사들은 글로벌 거대 자본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

 

방송사 관계자들은 "광고 매출과 투자가 매년 역대 최소를 갱신하는 상황에서 국내 영세 제작사들이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는 건 언감생심"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제작 PD는 "과거 영화, 드라마를 구분해 각기 다른 영역으로 창작 활동이 이뤄진 것처럼, OTT도 다른 선상에 놓고 제작될 수 있도록 제도적 접근이 필요하다"며 "국내 방송사, 플랫폼이 감당하지 못해 글로벌 자본에만 기대야 하는 지금의 사업 구조는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는 "지금 방송법과 드라마 규제는 수십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며 "각종 규제로 묶인 방송판을 다시 짜야 글로벌 OTT와 그나마 경쟁을 꿈꿔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한국 드라마 산업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제도적 혁신이 시급하다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한류가 뭐길래' 등을 저술한 심두보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콘텐츠 산업 분야에서 가장 먼저 뭔가 하려고 하는 게 브랜딩"이라며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기 위해 보여주기식 정책에 집착하기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영상 콘텐츠 정책을 새롭게 수립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K-드라마의 미래는 급증하는 제작비와 불균형한 수익 구조, 낡은 규제 체계라는 삼중고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화려한 글로벌 성공 이면에 숨겨진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한국 드라마 산업의 지속 가능성은 점점 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세계를 사로잡은 K-콘텐츠의 미래를 위해, 이제는 제작 환경과 규제 체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